유럽도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지난 10여 년간 집값과 월세가 동시에 급등하며 주거난이 유럽 전역의 구조적 위기로 확산되자, 유럽연합(EU)이 사상 처음으로 범유럽 차원의 부동산 대책을 공식 발표했다. '주거난이 민주주의 흔든다'를 주장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주택 정책을 각 회원국의 책임으로 맡겨왔던 EU가 직접 개입에 나섰다. 주거 문제가 더 이상 특정 도시나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 경제와 사회 전반을 흔드는 공통 리스크로 인식했기때문이다.

◆ 집값·월세 급등, 자산 문제 넘어 '민주주의 위기'로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2013년 이후 EU 전역의 주택 가격은 60% 이상 상승했고, 평균 임대료도 20% 넘게 올랐다. 특히 대도시에서는 임대료 상승폭이 더 커, 주거비 부담이 시민들의 일상과 삶의 선택을 직접적으로 제약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나온다.
주거비 급등은 노동 이동성 저하와 교육 기회 제한, 청년층의 가족 형성 지연으로 이어지며 사회 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주택 문제는 단순한 자산 가격 논쟁을 넘어 생활 안정과 사회 지속성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도심에서 시민들이 집값·임대료 인하와 강제퇴거 중단을 요구하며 대규모 집회를 벌이고 있다. 유럽 주요 도시에서 주거 비용 급등이 사회적 갈등으로 확산되면서, 각국 지방정부와 도시 시장들이 EU 차원의 대응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사진=AFP·로이터·셔터스톡 등 외신 자료)

◆ "사회주택 부족, 빈집은 많다"…유럽 주거 구조 모순
EU 집행위가 제시한 진단의 핵심은 '구조적 불균형'이다. EU 전체 주택 재고 가운데 사회주택 비중은 6~7%에 불과한 반면, 전체 주택의 약 20%는 비어 있는 상태로 남아 있다. 여기에 에어비앤비 등 단기 임대가 빠르게 늘어나며 도심 주거 시장의 왜곡이 심화됐다. 사회주택은 정부·지방자치단체 또는 공공기관이 건설·매입·지원해 저소득층·청년·취약계층에게 시세보다 아주 낮은 임대료로 공급하는 공공주택이다.
저렴한 주거 공간은 부족한데 빈집과 단기 임대만 늘어난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도심 거주민들의 임대료 부담은 빠르게 커졌고 주거난은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쟁점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 회원국 책임 넘어선 첫 범유럽 개입
그동안 주택 정책은 농업, 무역, 이주 정책과 달리 EU의 직접 관할 대상이 아니었다. 도시계획과 임대료 규제, 주거 보조금은 각 회원국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EU가 처음으로 범유럽 대책을 마련한 것은 개별 국가의 대응만으로는 집값과 월세 급등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실제 일부 국가에서는 주거난이 선거 결과와 정치 지형 변화로 이어지며, 주택 문제가 현실 정치의 핵심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 위기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 연 200만 가구 필요…공급 확대와 구조 개혁 병행
EU 집행위가 발표한 ‘저렴주택 공급계획(Affordable Housing Plan)’의 골격은 공급 확대와 제도 개혁을 병행하는 것이다. EU는 현재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매년 200만 가구 이상의 신규 주택이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이는 현재 연간 공급량보다 약 65만 가구 많은 수준으로, 이를 위해 연간 약 1,530억 유로(약 222조 원)의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공급 목표는 주거난을 단순한 시장 불균형이 아니라 사회·경제 전반의 구조적 위기로 인식하고 있다는 EU의 판단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주택 공급을 경기 대응 수단이 아닌 중장기 사회 인프라 투자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이전 정책과 결이 다르다.
EU는 건축 인허가 절차의 단순화와 디지털화, 혁신 건축 자재와 공법에 대한 공동 기준 마련, 건설 인력 재교육과 생산성 제고, 에너지 효율 개선을 통한 주거비 절감 등을 동시에 추진할 방침이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16일 공개한 ‘유럽 주거비 부담 완화 계획(The European affordable housing plan)’ 소개 화면. EU는 지난 10년간 집값과 임대료 급등으로 주거난이 심화되자, 범유럽 차원의 강력한 첫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사진=EU 집행위원회 홈페이지 캡처)

◆ 단기임대 규제와 공공 지원 확대…시장 개입 강화
EU는 주거난이 심각한 도시와 관광 지역을 중심으로 '단기 임대에 대한 추가 규제 입법'도 예고했다. 2026년 채택을 목표로 하는 ‘Affordable Housing Act(저렴 공공주택 법)’를 통해 투기적 거래와 단기 임대 확산을 관리하고 구조 개혁을 병행하겠다는 구상이다.
EU 집행위는 이번 대책을 통해 향후 2년간 약 4,300억 유로(약 745조 원) 규모의 재원을 주거 분야에 투입하겠다는 계획도 함께 제시했다.
주거 불안이 사회 갈등을 넘어 정치·민주주의의 안정성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문제 인식이 대규모 재정 투입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국가 보조금 규정도 완화해 사회주택뿐 아니라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주택 건설에도 공공자금 투입을 허용하고, 범유럽 주택 투자 플랫폼을 통해 공공과 민간 자본을 함께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EU는 2021~2027년 기간 동안 430억 유로 이상을 주거 분야에 투입했고, 2029년까지는 금융기관과 연계해 총 3,750억 유로 규모의 투자를 끌어낸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 유럽, 주택시장 왜 이러나…주거 위기 원인
유럽의 주거 문제가 이처럼 급격히 악화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금융위기 이후 장기간 이어진 저금리 환경 속에서 주택이 실거주 공간을 넘어 안정적인 투자와 자산 축적 수단으로 인식되며 자본이 집중됐다.
팬데믹 이후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 상승으로 신규 주택 공급이 제때 늘지 못했고, 관광 회복과 맞물린 단기 임대 시장의 급팽창도 임대료 상승을 부추겼다. 여기에 난민과 이민자 유입, 대도시로의 인구 집중, 노후 주택의 에너지 성능 개선 지연 등이 더해지며 주거비 부담이 누적됐다. 주거 문제는 집값과 월세를 넘어 도시에 계속 거주할 수 있느냐는 생활 기반의 문제로 확장됐고, 각국 정부의 개별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해졌다는 판단이 범유럽 차원의 개입으로 이어졌다.

◆ 글로벌 도시의 공통된 고민…장기전략 병행이 관건
EU의 주거 위기는 서울을 비롯한 글로벌 대도시들이 겪고 있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공급 부족 논란과 투자자 집중, 국내외 인구 지속 유입, 관광·비즈니스 단기 임대 수요 증가, 정책 대응의 시차 등이 맞물리면서 집값·임대료가 동시에 압박받는 구조는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각국 정부의 대응도 공급 확대, 투자수요 진입 규제, 임대주택 확대, 임대시장 관리, 취약 계층 보호 등을 병행하는 방법으로 정책을 내놓고 있다.
다만 이러한 대책이 단기간 가시적 효과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도 평가가 분분하다. 주거 시장 불안해소는 단기 처방만으로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데 있다. 정책 지속성과 집행력이 관건인데, 이 과제의 효과적 실행이 쉽지않다.
또한 대도시 집중을 완화하려면 '국토 균형발전 전략'의 병행이 필수다. 그렇지않으면 주거 불안은 반복될 가능성이 크기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국토균형발전 전략은 기본이고, 세종행정도시로의 서울 행정 기능 완전 이전을 보다 신속히 추진할 필요가 있다. 수도권에 집중된 공공과 민간 기능을 단계적으로 분산하는 방안이 장기 대책의 중요한 핵심 축이기때문이다.
EU의 이번 첫 범유럽 부동산 대책도 단기적 시장 안정에 그칠지, 아니면 주거 구조 전반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지는 앞으로의 정책 집행 과정에서 판가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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